애국지사 만촌(萬村) 밀양 박공 추모비 건립 제막

(2006815)

<비문(碑文)>

  저 포악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우리 국토를 강점했을 때 목숨을 던져 항일 구국 전선에 앞장 선 선열들이 아니 계시었던들 어찌 우리 조국이 광복 되었으리오. 우리는 유서 깊은 월아산(月牙山) 자락에 청석(靑石)을 세워서 애국지사 박호종(朴鎬鍾) 공의 행적 일단을 새김으로써 길이 후손들에 전하려 한다.

  공의 자는 성칙(聖則), 호는 만촌(萬村)이요 본관은 밀양으로 신라 박혁거세 왕의 후예이며, 고려조 규정공 위 현은 중시조요 조선조 부정공 위 이는 파조요 송월당 위 호원은 중세 현조이다. 오대조 위 재문공이 의령에서 진주 금산면 가방리로 이거하면서 자손들의 세거지가 되었으며 고조의 위는 유신이요 증조의 위는 수찬이요 조는 위가 건호요 고의 위는 헌홍이니 대대로 문행(文行)으로 유명하였다. (* 이계 박래오, 사촌 박규호 등)

  공은 1905년 가방리 세제(世第)에서 출생하니 용모가 출중하고 총명이 과인하여 가문의 촉망을 받았다. 장성함에 서숙에서 한학을 수학하면서 신동이라는 칭찬을 받았다. 12세에 진주 제일보통학교에 입학한 후 3학년 때에 삼일독립운동이 일어나 전국적으로 파급될 즈음 진주에서도 시일을 기하여 격렬한 만세세위가 전개되니 공도 피 끓는 의분으로 이 대열에 가담하였다. 이 사건으로 진주 경찰서에 연행되어 일개월 여 구금되는 동안에 학교에서는 퇴학을 당하였고 집으로 돌아온 공은 사람은 배워야 큰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사재를 털어 야학당을 열고 배울 기회를 얻지 못한 사람들에게 민족의식과 항일정신을 고취하던 중 일본 경찰의 감시가 심해지자 1925년 만주 대만을 거쳐 일본을 밀항하여 수학 과정 중 대판의 방직공장에 취업 후 조선인 근로자를 상대로 비밀리에 반일 독립정신을 선양하였다.

  1930년에 귀향하여 다시 야학을 개설하고 형제분[동생 박기종(朴琦種)]이 함께 교사 역할을 했으며, 이듬해 삼월에는 동지 송기호 장호관 박지원 조삼수 심호배 정성수 등 십구명과 조선공산주의자 진주협의회라는 비밀결사대를 조직하고 진주지구 총책과 금산면책을 겸임하여 민족 해방과 조국의 독립을 위해 결사대를 조직 활약하던 중 동년 칠월에 일경에 검거되어 일 년여에 걸친 혹독한 고문으로 빈사지경에 이르니 일시 가석되었다. 동지들은 심문과정에 공이 총책임자라는 것을 끝까지 부인한 관계로 공이 결석 재판으로 일년 징역 삼년 집행유예의 언도를 받았으나 고문의 여독으로 19401229일 향년 36세로 큰 뜻도 펴지 못한 채 서거하셨다.

  오호라 공이 가신지 어언 육십여 성상 추모의 정은 면면한데 그 빛나는 투쟁에 관한 기록들이 인몰되어 세상에 현창되지 못함에 뜻있는 인사들이나 자손들의 통한일러니 서자인 우상의 다년간의 추적으로 관련 기사가 게재된 일본 고등법원 검사국 사상월보 3권이 발견되고 이것이 증빙이 되어 부산지방법원 고문서 창고에서 상기한 진주지구 협의회의 농민회 독서회 학생회 사건에 관한 기록이 색출되어 그 전모가 드러나고 이로 인해 1996년 독립유공자로 대통령 표창장과 2001년 국가유공자 증서가 추서되니 그 지사 아버님 그 효자 아들 있다 하겠다.

  남도 유지 인사와 금산면 이장단 협의회의 성원으로 애국지사 만촌(萬村) 밀양 박공(朴公) 호종(鎬鐘) 추모비 건립위원회를 조직하고 안판수 위원장과 우상군이 나에게 비문을 청하므로 우상군은 평소에 같은 광복회원으로 우의가 깊은 사이인지라 비문 박덕을 무릅쓰고 감히 이렇게 적는 바이다. 공의 백절불굴의 굳은 지조와 시종여일한 애국충정은 민족의 역사와 더불어 영원하니라.

 

20059월 입추절 인천 후인 이태길 근찬 청송 후인 심홍보 근서

추진위원회 위원장 안판수 부위원장 강병일 이태길 권오엽

서기 2006815

 


독립운동가 박호종 선생 추모비 제막식

사진설명=20068월 15일 오전 11시 진주시 금산면 장사리 910-1 금호못 가에서 박호종 선생 추모비 제막식이 있었다.  <경남일보 2006815>

애국지사 박호종(朴鎬鍾. 1905~1940) 선생의 공적을 기리는 추모비가 15일 오전 11시 진주시 금산면 장사리 910-1 금호못 가에 세워졌다. 이날 제막식에는 금산면 가방리 주민들과 부산 등 유림에서 150여명이 참석했다.

 

* 관방

진주(晉州)의 젖줄인 남강(南江)이 감싸 흐르고, 월아산(月牙山)을 등지고 있는 진주시 금산면(琴山面)은 예부터 땅이 기름지고 풍속이 아름다운 고장이었다. 또한 유교 문화가 면면히 이어져 이곳에 있는 임천서원(臨川書院)에는 신암(新庵) 이준민(李俊民)을 비롯한 이 지방 선현 네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일찍이 퇴계 선생도 이 땅을 지나가면서 '청곡사를 지나며' 라는 시를 남겼는데, 지금 금산 못 가에 시비가 남아 있다. 임천서원에 배향된 이준민은 남명의 생질이며, 성여신은 제자이다. 하징과 한몽삼은 남명에게 직접 배우지는 않았지만 남명의 학문을 본받고자 한 사숙인이다.

예로부터 갓을 쓴 사람이 많다고 갓방으로 불리던 관방(冠坊)마을은 많은 선비들이 살았던 마을이다. 지금은 남평(南平) 문씨(文氏)와 밀양(密陽) 박씨(朴氏)들이 많이 살지만, 그 이전에는 전의(全義) 이씨(李氏)들이 많이 살았으며, 바로 신암 이준민의 집안이다. 신암 이준민은 1524년 진주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전의로 아버지는 공량(公亮)이며 어머니는 창녕 조씨 언형(彦亨)의 딸이다. 자는 자수(子修)이다. 신암의 어머니 조씨는 남명 선생의 누이이다. 그러니까 부친 공량은 남명의 자형이며, 신암은 남명의 생질이다.

 

 

<퇴락(頹落)한 임천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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