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尼溪) 박래오(朴來吾)

  “예전에 우리 고장의 선비 교와(僑窩) 성섭(成涉)은 문학으로서 당대에 이름이 드러나 남들을 잘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유독 영남에 뛰어난 선비 세 사람이 있다고 말하면서 태백산 아래에 두릉(杜陵) 이적성(李赤城) 남쪽에는 남야(南野) 박공(朴公) 그리고 두류산 동쪽에는 이계 (尼溪) 박공(朴公)이라고 했다.”
  한말 영남학맥의 중심 인물 중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한주 이진상의 말이다. 한주 이진상이 누구인가. 면우 곽종석의 스승이다. 정재 유치명의 학문을 전수 받아 면우에게 전한 대학자인 것이다. 한말 강우지역 학맥의 종장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비록 남의 말이지만 인용을 해 거론한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한주가 교와의 말을 인용해 거론한 세 사람은 이광정(李光庭), 박손경(朴孫慶) 그리고 박래오(朴來吾)이다. 한주는 이들을 두고 “두릉과 남야 양공은 덕행과 문장이 당시 우리 유림에서 으뜸으로 명망이 조야에 떨쳤으며 이계공도 그에 못지 않았으니 모두 뛰어난 선비라고 할 수 있다”라고 까지 했다. 성주 출신인 한주가 태백산 인근 선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고 여긴 이계 박래오는 지리산 인근의 선비이다. 곧 현재 산청군 단성면 남사마을에서 살았던 선비이다. 원지에서 지리산 쪽으로 6킬로미터 쯤 가다보면 여느 시골마을과는 달리 나무와 토담 기와집이 유달리 많은 마을이 나오는데 바로 남사 마을이다.
  이계는 1713년(숙종 39) 6월 14일 경일(經一)과 인동 장씨 사이에서 이 마을에서 태어났다. 자질이 온순하고 총명하여 취학한 지 얼마 안되어 문리를 알았다. 8세때 대바람 소리를 듣고 “깨끗한 바람 대숲에서 불어오니(淸風吹竹林) 나는 만현금을 가진 듯하네(我有萬絃琴)”라고 했다. 이듬해 식산 이만부가 지리산에 유람을 하러 왔다가 이계 조부를 방문하러 집에 들렀다. 식산(1664~1732)은 효성과 학행으로 천거되어 장릉참봉(長陵參奉)과 빙고별제(氷庫別提)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만년에는 역학(易學)에 전념했다. 문장에 능하고, 글씨도 고전팔분체(古篆八分體)를 특히 잘 쓰는 선비였다.
이때 식산은 어린 이계가 쓴 시문들을 보고 “장래가 촉망되는 아이로구나. 어찌 사소한 데 신경을 쓰면서 의리(義理)를 궁구하는 학문을 하지 않는가”라고 하면서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해 마지 않았다. 식산의 격려로 인해 니계는 더욱 학문에 정진을 하게 된다.
  현손인 규호(圭浩)가 지은 유사(遺事)에 한 일화가 전한다. “향시에 필력이 뛰어난 나이 많은 사람이 이계에게 글을 바꾸자고 제의를 했다. 이계는 부득이 이를 허락해 그 사람이 합격을 했다. 집에 돌아오니 부친이 괴이하게 여겨 이계가 가져온 답안지를 보고 필체가 다른 것을 보고 나무랐다. 이계가 사실대로 고하자, 부친은 선발시험은 국법을 어길 수 없는것이다 라고 하면서 다시는 시험장에 나가지 말라고 했다”이계의 뛰어난 자질과 집안 법도가 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일화이다.
  부친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는 과거를 포기하고 주자와 퇴계선생이 지은 책을 항상 곁에 두고 탐독해 마지 않았으며, 이를 자식들에게 권하기도 했다. 막내 아들인 재익(在翼)이 급제를 하자 주자의 상소문과 편지글 등을 손수 써서 2권의 책으로 만들어 주면서 “나라를 다스리는 계책과 벼슬에 나가고 물러가는 의리가 다 이 속에 있다. 명심해야 한다”라고 했다.
  또 퇴계선생의 ‘성학십도’와 ‘사단칠정’에 관한 글들을 묶어 1권의 책으로 만들어‘도동편(道東編)’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항상 곁에 두고 아침 저녁으로 이를 공부했다. 이계는 산수유람을 좋아했다. 일찍이 천왕봉, 섬진강 등지를 두루 유람하였을 뿐만 아니라 북으로는 안음삼동을 유람하고 한권의 기행문을 엮어 ‘인지총화(仁智總話)’라고 했다.
  이계는 나이가 들수록 학문에 대한 열정은 더 깊어만 갔다. 주위에서 건강을 걱정하는 말을 하면 “내 머리는 희지만 마음은 건장하다”라고 하면서 많은 글들을 지었다. 지역의 뛰어난 선비들인 청향당 이원, 죽각 이광우, 안분당 권규, 퇴암 권중도의 행장이나 묘갈명 등이 다 이계의 글이다.
  이계는 명암 정식, 양정재 하덕망, 교와 성섭, 동곽 이우육, 상계 권위, 죽옹 이중록, 묵옹 김돈 등 영남 일대의 명망있는 선비들과 교유를 하면서 자연을 벗삼아 일생을 보냈다. 거처하는 정자를 지어‘쌍백(雙白)’이라고 불렀다. 모래와 달의 깨끗함을 본받고자 한 것이다. 정자 뒤에 조그마한 집을 짓고 ‘정와(定窩)’라고 했다. 이계는 정와에서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학자들은 그를 이계(尼溪) 선생이라고 불렀다. 그가 살았던 마을 뒷산이 이구산이다. 그리고 마을 한가운데를 통과하여 흐르는 시냇물이 사수(泗水)로서 웅석봉에서 발원하여 아홉구비를 돌아 이곳을 지난다. 이구산과 사수는 공자의 탄강지인 산동성 곡부의 지명과 같다. 그가 살았던 지명을 따서 사람들은 이계선생이라고 불렀지만, 평생 공자의 도를 충실히 따랐던 선비였기에 그러했을 것이다.
  기자는 이계의 묘소를 찾았다. 면우 곽종석이 쓴 묘비가 서 있었다. 당대 명필 하용제의 글씨로 된 비석엔 이계가 주자와 퇴계의 도를 숭상해 평생 이를 실천하고자 했던 선비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었다.

경남일보 2003-12-28  강동욱 기자의 연재 기획 기사에서

(이사제 전경)

  이사재는 판서 송월당(松月堂) 박호원(朴好元)의 재실이다. 입암(立庵) 박헌수(朴憲修)의 기문과 송주(松州) 하도(河圖)의 현액이 있다. 네 모서리에는 활주가 세워져 있으며 외진주는 원기둥이고 내진주는 네모난 기둥이다. 중앙 마루 전면에는 계자난간을 비워 출입하는 곳으로 이용하고 있고, 양측면의 방 출입구는 세 짝 분합문으로 구성하였는데 세살문 형식을 보인다. 재실 서측에는 암반 밑에 얕은 우물이 있고 장방형의 연못이 연결되어 있다. 이 우물과 연못은 모서리에 잘 가공된 장대석과 장식 조각이 있어 건립 당시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상량문에 세 정사팔월로 기록된 것으로 건립 연대는 1857년으로 추정된다. 지정면적은 886이며, 건물 1(51.75)으로 규모는 정면 5, 측면 2칸이다.

(이사제 내부 마루)

  충무공 이순신 백의종군 행로지 표지석 내용(후면)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망추정 입구(예담촌 마을)의 이사재앞에 설치된 이 표지석은 이순신 장군이 정유년(1597)에 권율 도원수(道元帥)휘하에서 백의종군하기 위해 당시 원수부(元帥府)가 있던 합천 초계로 향하던 중 61일 날이 저물어 단성과 진주의 경계에 있는 박호원(朴好元)의 농사 짓는 종(노비)의 집에서 유숙하였다. 공은 전날부터 내린비가 채 개이기도 전에 일찍 길을 떠나 단계(丹溪)시냇가에서 조식을 하고 합천 삼가현으로 향하였다.

송월당공(松月堂公) 박호원(朴好元)

()의 휘()는 호원(好元)이요 자()는 선초(善初)이며 호()는 송월당(松月堂)이다. 1527(中宗22年 丁亥)에 부정공 이()의 아들로 태어나니 밀성군 광영(光榮)의 손자다.  외조(外祖)는 장수인(長水人)으로 판윤(判尹) 황맹헌(黃孟獻)이며 중종때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올라 장원군(長原君)에 녹봉되었다. 처부(妻父)는 김명윤(金明胤)이다.  

1546년(明宗1年 丙午) 사마시(司馬試)에 뽑혔으며 1552 (명종 7. 임자) 4월의 식년시(式年試)에 병과(丙科)에 급제하였는데 이때, 세 종형제(從兄弟) 종질(從姪) 4인이 동방(同榜) 하여 가문에 경사를 가져왔는데 종형(從兄, 4) 인원(仁元)과 재종형(再從兄, 6) 근원(謹元), 종질(從姪, 5촌조카) 계현(啓賢) 등 이다 

1557년(明宗12年 丁巳)에 홍문관(弘文館) 부수찬(副修撰)이 되었다가 수찬(修撰). 교리(校理)에 올랐으며 1561(明宗16年 辛酉)에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문학(文學), 보덕(輔德)을 역임하고 1567(明宗22年 丁卯 ) 승정원좌부승지(政院左副承旨). 충청도관찰사(忠淸道 觀察使)를 거쳐 1576(宣祖9年 丙子)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에 올랐다가 1580(宣祖13年 庚辰)에 호조판서(戶曹判書), 1583(宣祖16年 癸未)에는 의정부좌참찬(議政府左參贊)을 지냈다훗 날 좌찬성(左贊成)에 증직(贈職)되었다

()의 묘()는 경기도(京畿道) 고양시(高陽市 두응촌(豆應村) 선영하(先塋下) 후원(後園)에모시었다.  밀양박씨(密陽朴氏) 규정공파(糾正公派) 31소파 중 하나인 송월당공파(松月堂公派)의 파조(派祖)이다.

송월당 박호원의 부친은 내자시 부정을 지낸 박이, 조부는 형조참판을 지낸 박광영, 증조부는 예조참의를 지낸 대민공 존성재 박미다. 박호원은 집현전 부제학을 지낸 나산경수 박강생의 6대손이며 계유정난으로 정난공신에 책록되어 이조판서를 지낸 공효공 묵재 박중손의 현손이다. 또한 박호원은 호조참의를 지낸 박의영, 호당에 뽑혔던 홍문관 교리 눌재 박증영, 황해도관찰사를 지낸 박소영, 승지를 지낸 박의영의 종손이며 대제학과 우찬성을 지낸 문경공 낙촌 박충원의 재종아우다. 어머니는 영의정을 지낸 장성공 방촌 황희의 5대손이며 한성부판윤을 지낸 소양공 월헌 황맹헌의 딸이다. 부인은 광산김씨로 중종조 훈구파 대신으로 활동했던 좌찬성 평정공 김극핍의 손녀이며 명종조 권신 윤원형의 일파였던 이조판서 김명윤의 딸이다. 박호원은 부인과의 사이에서 4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판관 박시현, 차남은 참봉 박귀현, 다음은 사헌부 감찰 박태현 그리고 막내는 형조판서 의곡 박정현이다.  

대대로 높은 관직에 나갔던 집안에서 태어난 박호원은 19세의 나이로 사마시에 급제하고 7년 후엔 문과에까지 급제하며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29세에 북평사로 함경도에 나갔던 그는 2년 후 내직으로 돌아와 홍문관 수찬, 사간원 헌납, 홍문관 교리, 성균관 전적 등을 지냈다. 용강현령, 세자시강원 문학, 의정부 검상, 의정부 사인으로 승차한 그는 황해도에서 도적들이 발호하자 토포사 남치근의 종사관으로 공을 세웠다. 임꺽정 등의 도적을 제압한 그는 그 공으로 세자시강원 보덕, 예빈시 정으로 승차했으며 40세에는 당상관에 올라 승정원 동부승지에 임명되었다. 우부승지, 좌부승지를 역임하였으며 선조 즉위 이후에도 계속 승정원에 있으면서 임금을 측근에서 보필했다. 병조참의, 대사헌, 예조참판, 호조참판 등의 요직을 두루 지낸 그는 54세에는 자헌대부의 품계에 올라 호조판서로 승차하였으며 이듬해 좌참찬을 지냈다. 그가 58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조정에서는 대신의 죽음을 애도하며 예장을 치르도록 도왔으며 사후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박호원은 호조참판과 호조판서를 두루 지냈던 경제관료였으며 훈구파의 자손이었으나 선조조 사림이 전면에 등장한 이후에도 너그러운 인품으로 그들과 대립하지 않고 원만하게 관직생활을 했고 정치적으로는 동인과 가까운 인물이었다.

묘소는 주교동 선영 뒤쪽에 아들 박정현의 묘소 위쪽에 자리잡고 있다. 선영은 전체적으로 후손들이 정성껏 단장하여 깔끔한 모습이며 묘소는 부인과 쌍분으로 조성되어 있다. 둘레석을 두른 사각 봉분 앞쪽으로 묘비, 혼유석, 상석, 향로석이 차례로 놓여 있고 좌우에는 망주석과 문인석이 한 쌍씩 놓여 있다. 1976년 9월 후손들이 건립한 묘비 앞면에는 贈崇政大夫左贊成行資憲大夫戶曺判書松月堂朴公好元  之墓 라고 되어 있어 호조판서를 지낸 송월당 박호원의 묘소 임을 알 수 있고 뒷면에는 가계와 행적이 기록된 음기가 새겨져 있다. 비문은 면우 곽종석의 문인으로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우리나라 유림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던 중재 김황(1896-1978)이 지었으며 글씨는 하용문이 쓴 것이다. 

묘역 입구에는 여러 기의 신도비가 놓여 있는데 박호원의 것도 건립되어 있다. 이수와 귀부를 갖춘 비석은 1987년 만들어진 것으로 비신 상부에 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行資憲大夫戶曺判書朴公神道碑銘 이라고 전액되어 있어 박호원의 것임을 알 수 있다. 비문은 한주 이진상의 문인으로 구한말 대표적인 유학자이자 일제강점기 파리장서 사건의 대표로 옥고를 치르고 1963년 건국훈장을 추서받은 의정부 참찬 면우 곽종석(1846-1919)이 지었으며 글씨는 근대 진주를 대표하던 유학자 담헌 하우선의 문인 오천 정직교가 썼으며 전액은 성균관장을 지낸 김경수(1922-2009)가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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