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촌(沙村)  박규호(朴圭浩)

 

“박진사 찬여(瓚汝)가 사는 곳은 사월리이다. 앞의 시내에는 깨끗한 모래가 펼쳐져 있고 찬 달이 밝게 비쳐 마을의 이름을 이로써 했다. 찬여의 집은 자그마한데 흙 계단에는 갈대가 소슬하고 냉랭하다. 그러나 시렁에는 경사(經史)가 있어 이로 더불어 아침 저녁으로 옛 선현들의 가르침을 익히면서 개울에 나가 몸을 씻고 달을 대하여 시를 읊으며 가슴에는 한점의 티끌이 없는 듯 고결하였다.”

이 글은 산청군 단성면 남사마을에 있는 삼백헌(三白軒) 이란 정자 기문의 일부분으로, 고종 임금의 부름에도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나라의 광복과 도학 부흥을 위해 평생을 보낸 면우 곽종석이 ‘박진사’라는 사람을 위해 지은 것이다. 면우가 삼백헌(三白軒)이라고 한 것은 모래도 희고 달도 희고 그 사람도 희다는 의미에서 였다.

그러면 면우가 ‘가슴에는 한점 티끌이 없는 듯 고결하였다’고 평가한 박진사는 누구인가.  후세 사람들이 ‘남사마을 박진사’라면 굳이 이름이 필요없었던 사촌(沙村) 박규호(朴圭浩)라는 사람으로 ‘찬여(瓚汝)’는 그의 자이다.

남사의 박씨들은 조선 명종 후반에 임꺽정을 토벌하는 토포사(討捕使)의 종사관(從事官)에 임명되어 이들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우고 숙마(熟馬) 1필을 하사받은 송월당(松月堂) 박호원(朴好元)의 후예로 근세에는 이계(尼溪) 박래오(朴來吾)가 경학(經學)과 행의(行誼)로 이름이 드러났으니, 바로 사촌의 고조부이다.

사촌은 면우와 같은 마을에 살면서 가장 가까이 지냈던 선비이다. 후배 선비들은 사촌을 말할 때 면우와의 관계를 자주 거론하는 것은 그의 인품과 학식을 이미 면우가 인정했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면우의 수제자라고 할 수 있는 회봉 하겸진은 “면우 곽선생의 친한 벗이 있으니 바로 사촌 박공이다. 공과 면우는 나이는 조금 차이가 있지만 사는 곳이 같고 스승이 같다. 예로부터 그 사람을 알지 못하면 그 친구를 보라고 했다. 이로써 공을 알 수 있다.”라고 했다.

면우 제자인 중재 김황도“면우 곽종석 선생이 교유했던 사람들은 모두 빼어난 선비들인데 그중 가장 친하고 오래 사귄 사람이 바로 박사촌옹이다. 사촌은 면우선생 보다 4살이 적으면서 어릴때 부터 한마을에 살았던 면우 선생을 따랐다. 또 함께 한주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의 요지를 들었다”라고 했다. 이처럼 면우와 친했던 사촌은 1850년 사월리에서 태어났는데 부친은 수덕(受悳)이며 생부는 수회(受晦)로 품성이 성실했다. 생부의 묘비에 면우는 처사(處士)라고 기록을 할 정도였다.

사촌은 5세 때 모친 강성(江城) 문씨(文氏)를 여의고 6세 때 형을 따라 족조(族祖) 집의공(執義公) 재호에게 글을 배웠는데, 총명함이 남달라 집의공이 장차 크게 될 아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어릴때 부터 마을 어른을 공경할 줄 알았으며, 과일을 얻으면 반드시 부모나 형에게 먼저 드시기를 권했다. 자라서 형을 따라 마을의 서당에 나가 공부를 하는데 동학들이 많았는데, 그중 면우 곽종석과 가장 친했다. 17세 때 부친의 명으로 종숙부의 양자로 들어갔다. 양자로 들어간 2년후 생부인 처사공이 세상을 떠나자 건강을 잃을 정도로 슬퍼했다.

1877년 가을에 후산 허유, 물천 김진호 등 지역의 대표적인 선비들이 두류산 유람길에 사월에 들렀다. 이때 사촌은 면우와 월연 이도추, 약헌 하용제와 같이 이들 일행을 따라 천왕봉에 올랐다. 천왕봉에서 돌아온 지 얼마되지 않아 한주 이진상이 남쪽으로 내려와 사월에 들렀는데, 만성 박치복, 단계 김인섭 등 마을의 대선비들이 함께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행하고 태극도설(太極圖說)을 강론했다. 사촌은 여러 선비들과 이 자리에 참석해 한주 이진상으로부터 많은 격려를 받았다.

이듬해인 1876년 사촌은 면우, 물천과 함께 성주의 대포로 가서 한주 이진상을 배알했다. 이때 한주의 주리설(主理說)을 듣고 물러 나와 한주의 아들인 대계(大溪) 이승희(李承熙)와 한주의 이학종요(理學綜要)를 강론하고 큰 감명을 받았다.
사촌은 한주를 배알하고 난 후 다시 물천과 함께 고령의 다산(茶山)으로 만구 이종기를 방문해 서로 학문을 토론했다. 이어 사촌은 만구, 물천, 면우, 대계 등과 선석사(禪石寺)에서 한주선생을 모시고 인근의 선비들과 수일동안 강학을 했다. 강학을 마치고 금오산으로 가서 야은 길재의 유적을 참배하고 돌아왔다.

이해 가을에 처음으로 서울에 올라갔다. 사촌은 항상 입신양명(立身揚名)의 꿈을 가지고 있었으나, 공명(功名)만을 추구하는 사람들과 다투기 싫어 과거장에는 나아가지 않았다. 이때는 형의 명령으로 서울에 올라가 당시 정승인 강노, 판서인 신헌구 등을 만나 자질을 인정 받았다. 1882년 33세의 나이로 사마시(司馬試)에 합격을 했다. 이해 만성 박치복도 합격을 했다.

이듬해에 면우 월연 등과 금강산을 유람하고 관동의 명승지를 두루 둘러보았다. 50여일동안 여정에 많은 시를 남기기도 했다. 이해 가을 서울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를 하는데 학규가 해이해지고, 학생들이 권문세가를 찾아 아첨을 하고, 공부보다는 노는데 치중하는 것을 목격하고는 과거를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으로 돌아온 사촌은 가업(家業)과 유업(儒業)을 계승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다. 고조부 니계의 문집을 망추정에서 간행 하는 것을 비롯해 고양(高陽)에 있는 송월당공 이하 13세 선영이 관리가 안되는 것을 보고 문중에 통문을 돌려 이를 개수하는데 앞장을 섰다.

거창 원천정에서 한주 선생 문집을 간행하자 이를 도왔으며, 후산 허유를 모시고 산천재에 들어가 남명 선생 문집을 교정하는 일에도 참여를 했다. 이때 사촌은 한주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제자인 후산 허유를 스승으로 모시고 학문에 정진을 하고 있었다. 1905년 을사조약의 변고를 듣고 면우와 연명상소(聯名上疏)하였으며, 경술국치 후에는 일제가 주는 소위 ‘은사금(恩賜金)’을 물리치기도 했다. 경술국치를 당하던 해가 사촌의 환갑이었다. 자손들이 환갑 잔치를 열 것을 건의하자 “나라를 잃은 사람이 무슨 잔치냐”며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1919년 면우 곽종석이 중심이 된 전국의 유림들이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조선의 독립을 청원하는 글을 보내는데, 사촌은 여기에 서명을 한다. ‘파리장서’에 서명을 하고 곧 체포돼 성주 감옥에 수감된다. 성주 감옥에서 자신의 뜻을 조금도 굽히지 않자 일제는 다시 대구감옥으로 이송하여 뜻을 꺾으려 했지만, 도리어 사촌은 일제를 준엄하게 꾸짖었다. 감옥에서 일제가 주는 음식을 거부해 3일만에 병이 깊어 보석으로 석방이 되었다. 면우 역시 병으로 같이 석방이 되었다. 석방이 된 두사람은 편지로써 서로 위로를 하며 우의를 다지기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면우가 병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사촌은 실신할 정도로 슬픔을 이기지 못해 보는 사람이 이를 안타깝게 여겼다.

면우가 세상을 떠난후 산사로 들어가 세상일을 잊고 강학에 심혈을 기울였으니 소문을 듣고 찾아 오는 선비들이 많았다.
이로부터 사촌은 선대 업적을 선양하는 일에 몰두하면서, 한편으로는 고을의 어른으로서 풍속의 교화에 앞장서는 등 많은 활동을 하다가 1930년, 선대 재실인 망추정에서 집안의 화목을 자손들에게 당부를 하면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81세였다.
지금 남사마을에는 ‘삼백헌’이 있어 사촌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삼백헌에는 면우의 기문이 있어 후세 사람들에게 사촌의 사람됨을 더욱 명확히 알리고 있다.

영남학맥을 계승한 뛰어난 선비로, 나라의 광복을 위해 힘쓴 애국지사로, 마을의 어른으로 한 평생을 보낸 사촌의 유풍은 지금 남사마을에 그대로 전해오고 있다. 그가 말년에 머물렀던 망추정은 퇴락했지만, 그의 정신은 뜻있는 사람들에 의해 전해오고 있는 것이다.

                                                                                   경남일보 2005-12-9  강동욱 기자의 연재 기획 기사에서

 

   사촌 박규호가 학문을 연마한 삼백헌. 면우가 이름을 지었다. 경상대학교 문척각에 소장돼 있는 사촌 친필(왼쪽 위)과

   사촌집(왼쪽 아래)

  (망추정 전경 1)

(망추정 전경 2)


Copyright(c) 2001 Young-Mok Park.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