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월당공(松月堂公) 박호원(朴好元) 규정공*의 11세 손인 공(公)의 휘(諱)는 호원(好元)이요 자(字)는 선초(善初)이며 호(號)는 송월당(松月堂)이다. 1527년(中宗22年 丁亥)에 부정공 이(苡)의 아들로 태어나니 밀성군 광영(光榮)의 손자다. 외조(外祖)는 장수인(長水人)으로 판윤(判尹) 황맹헌(黃孟獻)이며 중종때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올라 장원군(長原君)에 녹봉되었다. 처부(妻父)는 김명윤(金明胤)이다. 1546년(明宗1年 丙午) 사마시(司馬試)에 뽑혔으며 1552년 (명종 7. 임자) 4월의 식년시(式年試)에 병과(丙科)에 급제하였는데 이때, 세 종형제(從兄弟)와 종질(從姪) 4인이 동방(同榜) 하여 가문에 경사를 가져왔는데 종형(從兄, 4촌) 인원(仁元)과 재종형(再從兄, 6촌) 근원(謹元), 종질(從姪, 5촌조카) 계현(啓賢) 등 이다. 1557년(明宗12年 丁巳)에 홍문관(弘文館) 부수찬(副修撰)이 되었다가 수찬(修撰). 교리(校理)에 올랐으며 1561년(明宗16年 辛酉)에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문학(文學), 보덕(輔德)을 역임하고 1567년(明宗22年 丁卯 ) 승정원좌부승지(承政院左副承旨). 충청도관찰사(忠淸道 觀察使)를 거쳐 1576년(宣祖9年 丙子)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에 올랐다가 1580년(宣祖13年 庚辰)에 호조판서(戶曹判書), 1583년(宣祖16年 癸未)에는 의정부좌참찬(議政府左參贊)을 지냈다. 훗 날 좌찬성(左贊成)에 증직(贈職)되었다. 공(公)의 묘(墓)는 경기도(京畿道) 고양시(高陽市 두응촌(豆應村) 선영하(先塋下) 후원(後園)에모시었다. 밀양박씨(密陽朴氏) 규정공파(糾正公派) 31소파 중 하나인 송월당공파(松月堂公派)의 파조(派祖)이다. 송월당 박호원의 부친은 내자시 부정을 지낸 박이, 조부는 형조참판을 지낸 박광영, 증조부는 예조참의를 지낸 대민공 존성재 박미다. 박호원은 집현전 부제학을 지낸 나산경수 박강생의 6대손이며 계유정난으로 정난공신에 책록되어 이조판서를 지낸 공효공 묵재 박중손의 현손이다. 또한 박호원은 호조참의를 지낸 박의영, 호당에 뽑혔던 홍문관 교리 눌재 박증영, 황해도관찰사를 지낸 박소영, 승지를 지낸 박의영의 종손이며 대제학과 우찬성을 지낸 문경공 낙촌 박충원의 재종아우다. 어머니는 영의정을 지낸 장성공 방촌 황희의 5대손이며 한성부판윤을 지낸 소양공 월헌 황맹헌의 딸이다. 부인은 광산김씨로 중종조 훈구파 대신으로 활동했던 좌찬성 평정공 김극핍의 손녀이며 명종조 권신 윤원형의 일파였던 이조판서 김명윤의 딸이다. 박호원은 부인과의 사이에서 4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판관 박시현, 차남은 참봉 박귀현, 다음은 사헌부 감찰 박태현 그리고 막내는 형조판서 의곡 박정현이다. 대대로 높은 관직에 나갔던 집안에서 태어난 박호원은 19세의 나이로 사마시에 급제하고 7년 후엔 문과에까지 급제하며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29세에 북평사로 함경도에 나갔던 그는 2년 후 내직으로 돌아와 홍문관 수찬, 사간원 헌납, 홍문관 교리, 성균관 전적 등을 지냈다. 용강현령, 세자시강원 문학, 의정부 검상, 의정부 사인으로 승차한 그는 황해도에서 도적들이 발호하자 토포사 남치근의 종사관으로 공을 세웠다. 임꺽정 등의 도적을 제압한 그는 그 공으로 세자시강원 보덕, 예빈시 정으로 승차했으며 40세에는 당상관에 올라 승정원 동부승지에 임명되었다. 우부승지, 좌부승지를 역임하였으며 선조 즉위 이후에도 계속 승정원에 있으면서 임금을 측근에서 보필했다. 병조참의, 대사헌, 예조참판, 호조참판 등의 요직을 두루 지낸 그는 54세에는 자헌대부의 품계에 올라 호조판서로 승차하였으며 이듬해 좌참찬을 지냈다. 그가 58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조정에서는 대신의 죽음을 애도하며 예장을 치르도록 도왔으며 사후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박호원은 호조참판과 호조판서를 두루 지냈던 경제관료였으며 훈구파의 자손이었으나 선조조 사림이 전면에 등장한 이후에도 너그러운 인품으로 그들과 대립하지 않고 원만하게 관직생활을 했고 정치적으로는 동인과 가까운 인물이었다. 묘소는 주교동 선영 뒤쪽에 아들 박정현의 묘소 위쪽에 자리잡고 있다. 선영은 전체적으로 후손들이 정성껏 단장하여 깔끔한 모습이며 묘소는 부인과 쌍분으로 조성되어 있다. 둘레석을 두른 사각 봉분 앞쪽으로 묘비, 혼유석, 상석, 향로석이 차례로 놓여 있고 좌우에는 망주석과 문인석이 한 쌍씩 놓여 있다. 1976년 9월 후손들이 건립한 묘비 앞면에는 贈崇政大夫左贊成行資憲大夫戶曺判書松月堂朴公好元 之墓 라고 되어 있어 호조판서를 지낸 송월당 박호원의 묘소 임을 알 수 있고 뒷면에는 가계와 행적이 기록된 음기가 새겨져 있다. 비문은 면우 곽종석의 문인으로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우리나라 유림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던 중재 김황(1896-1978)이 지었으며 글씨는 하용문이 쓴 것이다. 묘역 입구에는 여러 기의 신도비가 놓여 있는데 박호원의 것도 건립되어 있다. 이수와 귀부를 갖춘 비석은 1987년 만들어진 것으로 비신 상부에 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行資憲大夫戶曺判書朴公神道碑銘 이라고 전액되어 있어 박호원의 것임을 알 수 있다. 비문은 한주 이진상의 문인으로 구한말 대표적인 유학자이자 일제강점기 파리장서 사건의 대표로 옥고를 치르고 1963년 건국훈장을 추서받은 의정부 참찬 면우 곽종석(1846-1919)이 지었으며 글씨는 근대 진주를 대표하던 유학자 담헌 하우선의 문인 오천 정직교가 썼으며 전액은 성균관장을 지낸 김경수(1922-2009)가 한 것이다.
*규정공(糾正公) 박현(朴鉉박현) 고려의 문신으로, 密城君(밀성군) 惟孝(유효)의 손자이며, 密城君(밀성군) 興의 아들이다. 司憲府 糾正(사헌부 규정)과 太師(태사)를 지냈으며, 道學(도학).文章(문장).節義(절의)로 당세에 이름이 높았다. 糾正公派(규정공파)의 派祖(파조)로 시호는 武烈(무열)이며, 沃川(옥천)의 遠德祠(원덕사)에 祭享(제향)되었다. 受敎忠節錄(수교충절록)에서는 "...東方道學(동방도학)의 祖宗(조종)... 崇義殿(숭의전) 孔子廟(공자묘)에다 같이 제사하기를...高麗太師代死功臣(고려태사대사공신) 淸白吏(청백리) 糾正公(규정공) 朴 鉉(박 현)...文成公(문성공) 安裕(안유).文憲公(문헌공) 崔沖(최충) 등과 한 몸이다..."라고 공을 극찬하고 있다. 밀성대군 언침의 16세손으로 할아버지 유효(惟孝)는 밀성군(密城君)으로 시호는 문숙(謚文肅)이며 아버지 흥(興)은 밀성군으로 시호(諡)는 문정(文靖)이다. 고려 충선왕(忠宣王)때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규정과 태사(太師)를 지냈으며, 수교 충절록(受敎 忠節錄)에 의하면 대사헌 박상충(朴尙衷)이 상서하여 인의(仁義)를 베풀고 충의(忠義)를 다한 동방도학(東方道學)의 조종(祖宗)이라 하였다고 전전(田傳). 고려 태사 대사공신(代死公臣) 청백리 박현은 크게 글을 일키고 몸을 날에 순절(殉節)하여 천지를 다시 밝혀 명성이 멀리 퍼졌다고 함. 충열왕때 원(元)과 합(合)하여 일본을 정벌하여 그 서해제도를 공략한 후로부터 왜구의 성질을 매우 악화하여 충정왕 2년(1350년)부터 고려는 거의 매년 구화(寇禍)를 입었는데 전라지방이 더욱 심하였다. 공은 전주지방(全州地方)에서 전몰(戰歿)하여 대사공신(代死功臣)이 되었다. 시호(諡)는무열(武烈)이다. 제향은 원덕사. 세덕사. 숭양사 지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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